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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 이상한 나라의 진중권 (두고두고 곱씹어 읽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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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가해 2010. 8. 18.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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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 씨는 내 글 오류와 희망에 대한 반박글로 쓴 양가죽을 쓴 늑대에서 “진중권 씨를 비롯한 진보신당 당적의 자유주의자들”이라는 표현이 자신을 모욕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했다. 같은 글에서 “내가 자유주의자라는 것은 나를 아는 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유주의자라는 말에 모욕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무슨 말인진 모르겠지만, 문제를 삼았으니 굳이 설명을 하면 이렇다. ‘진보신당 당적의 자유주의자들’이라는 표현은 그 표현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자유주의자’ 딱지를 붙이려는 것도 ‘진보신당에서 자유주의자들을 몰아내자’는 말도 아니다. 심지어 그들이 ‘좌파가 아니라 자유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진중권 씨는 자신이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걸 못 봐주”는 사람이지만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강력한 개입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전자는 선뜻 수긍이 가면서도 후자에 대해선 과연 그런가, 싶긴 하지만 어쨌거나 민주주의 양식에 근거하여 진중권 씨의 자신에 대한 설명을 그대로 인정하도록 하자. 일반적으로 개인의 자유는 존중하되 시장의 자유는 강력하게 통제되어야 한다고 보는 사람을 ‘자유주의적 좌파’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진중권 씨를 ‘자유주의적 좌파’라 하지 않고 ‘진보신당 당적의 자유주의자’라는 상대적인 표현을 사용한 건 그가 자신과 다른 정체성을 가진 당원들, 특히 자신보다 급진적인 당원들의 정체성을 존중하며 정당한 비판과 토론을 하는 게 아니라 매우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태도를 보여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진중권 씨는 진보신당 내의 의견그룹인 <전진>의 한 내부용 문건을 검토(‘검열’이라는 말이 좀더 어울리겠지만)한 후 “전진은 사회주의자들”이라 판정하고, 나가거나 해체할 것은 요구했다.

나는 진중권 씨가 “80년대의 화석들” “닭짓 하는 사람들”이라 조롱하는 급진적인 좌파들 중에서도 이런 행태를 본 적이 없다. <전진> 역시 진중권 씨에게서 그런 부당한 공격을 당하면서도 그 또한 한 당원의 의견으로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진중권 씨의 행태는 옛 현실사회주의의 관료들이나 그걸 그대로 흉내 낸 80년대의 관념적 운동조직(진중권 씨가 몸 담았던)에서나 볼 수 있었던 풍경이다. 포스트모던을 설파하고 자신이 디지털 시대에 적응한 가장 세련되고 유연한 좌파임을 자임해온 진중권 씨의 이런 행태를 어떻게 봐야 할까?





또한 진중권 씨는 “그나마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간직한 그룹”이라는 표현에 대해  “정체성은 동시에 ‘동일성’을 의미한다. 다른 모든 당원들을 제 형상대로 찍어내야 비로소 당의 정체성이 유지된다는 강박관념”이라고 했다. 놀랍다. 파시스트나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자기 의사에 의해 자유롭게 입당하고 탈당할 수 있으며 당원의 정체성을 근거로 입당과 탈당 여부를 강제할 수 없는 현대적 민주주의 정치에서 정당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정당의 정체성’이란 진중권 씨의 말처럼 ‘정체성이 하나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지배적인 정체성’을 말한다.


여러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당원들이 존재하지만 지배적인 정체성이 정당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나라당에도 민주당에 더 걸맞은 정체성을 가진 당원이 있을 수 있고 진보신당에도 민주당에 더 걸맞은 정체성을 가진 당원이 있(을 수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런 당원들이 당의 정체성에 문제가 되는가 안 되는가, 는 그런 당원들의 ‘존재’가 아니라 ‘영향력’에 달려 있다. 만일 한나라당에 민주당에 더 걸맞은 정체성을 가진 당원들의 영향력이 훨씬 크다면, 다시 말해서 한나라당에 보수주의 정체성을 가진 당원보다 자유주의 정체성을 가진 당원들의 영향력이 훨씬 크다면 한나라당은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그 위기는 당연히 한나라당의 정당으로서 존립 위기로 이어진다.

오류와 희망은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이다. 즉 진보신당이 존립 위기에 빠졌는데 그 주요한 원인이 정체성의 위기라는 내 의견을 사회적으로 제출한 것이다. ‘전진’을 “그나마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간직한 그룹“이라 말한 건 진중권 씨 말대로 진보신당의 모든 당원들을 전진의 정체성으로 통일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진보신당이 민주당 같은 자유주의 정당과 별개로 존재해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렵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정체성의 위기를  보이는 현실을 전제로, 그런 흐름에 ‘대응하는 경향의 정체성을 가진 그룹’으로서 전진을 말한 것이다. "다른 모든 당원들을 제 형상대로 찍어내야 비로소 당의 정체성이 유지된다는 강박관념"은 실은 진중권 씨의 것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진중권 씨가 당의 ‘이념감독관’으로서 “사회주의자들”이라 판정한 전진은 사회주의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사회주의에 대해 조갑제 이상의 반감을 가진(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적기로) 진중권 씨의 눈에는 전진과 그들의 문건이 ‘완전 사회주의’로 보일 수도 있지만, 애석하게도 전진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사민주의자들이다. 자본주의 모순을 체제 변혁을 통해 이루려는 사람들이 아니라 체제 안에서(의회 진출과 복지 증진 등으로) 극복하려는 사람들이다. 전진은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보편적으로 담고 있는 그룹인 것이다.

한국의 좌파들은 크게 진보정당(민노당, 진보신당)에 참여한 그룹과 참여하지 않은 좀더 급진적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그렇게 좌파진영 전체를 놓고 볼 때 전진은 가장 오른쪽의, 온건한 그룹에 속한다. 실제로 좀더 급진적인 경향의 좌파들 가운데는 ‘전진도 좌파야?’ 식의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그런 전진이 진보신당에서 해체하거나 나가야 할 낡은 사회주의자들이라면 대체 진보신당의 정체성은 뭐가 되어야 할까? ‘진보정당이길 포기하고 자유주의 정당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설사, 전진이 진중권 씨 주장에 합치하는 낡은 사회주의자들이라 하더라도 누구도 그들에게 나가거나 해체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다. 전진이 당의 민주주의를 존중하며 비판과 토론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한다면 말이다. 민주주의란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서로 존중하면서 비판과 토론을 통해 좀더 나은 결과를 찾아나가는 사회 원리이다.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는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존중하지 않고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태도에 반대한다. 우리가 우파를 존중하지만 극우는 사회의 적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그래서다. 

진중권 씨는 자신이 “천성이 리버럴해서 국가가 개인의 권리에 침해하는 걸 못 봐주는 편”이라고 했다. 좋은 이야기고, 나 역시 그렇다. 그런데 그럼 사람이라면, 국가가 어떻고 이전에 다른 개인의 권리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사유와 상상력을 검열하여 이념을 재단하고 나가라 사라져라 요구하는 사람이 “타고난 리버럴이라 국가가 개인에 간섭하는 꼴을 못본다”고 말하는 건 해괴한 일이다. 사실 그런 태도는 2010년의 한국에선 한나라당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조갑제나 지만원 같은 아예 내놓은 극우 인사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진보신당 당적의 자유주의자"라 부르는 건 모욕적인 딱지붙이기일까, 과분한 상찬일까?





(사회주의니 사민주의니 하는 이야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행여 불편하게 생각하진 말기 바란다. 한국이란 나라는 참 이상해서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전공한 사람도 사민주의와 사회주의는커녕 자유주의와 좌파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간략한 설명을 올린 게 있으니 참고하시길.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민주의, 사회주의 )

현실 사회주의의 경험을 통해 국가 사회주의의 폐해가 확인되고 또 노동자들이 끝없이 자본에게 포섭되어감으로써 혁명을 통한 사회변화가 요원해지는 현실 속에서 사민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현명한, 그리고 가장 현실적인 좌파 노선으로 여겨진다. 밝히자면 나 역시 사민주의 노선의 미덕을 충분히 인정한다. 게다가 나는 체제 안에서 어린이 잡지를 발행하며 활동하고 있으니 반드시 사민주의와 대별되는 의미에서 사회주의 노선을 가져야 하는 상태에 있는 건 아니다. 그런 내가 굳이 진보정당에 입당하지 않고 사민주의 세력보다 사회주의 세력에 좀더 가까운 입지를 가지는 가장 큰 이유는 사회주의 세력의 성장이 사민주의 실현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사민주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아는 이야기지만 사민주의는 급진적인 사회주의 운동과 자본주의 체제의 타협으로 만들어진 체제다. 사회가 성숙하고 자본가들이 계몽되고 선해져서 사민주의가 만들어진 게 아니라, 사회주의 세력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자본이 자본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한 타협물로(자본주의 판이 깨지는 것보다는 이문을 줄여서라도 유지하려는) 선택한 게 사민주의 체제인 것이다. 물론 서유럽이나 북유럽 사회처럼 사민주의가 구현된 지 이미 오래인 사회들은 사민주의 사회의 운영 원리들이 ‘시민의 상식’으로 되어 있어서 강력한 사회주의 세력이 없어도 사민주의 체제가 유지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한국처럼 사민주의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는 사회가 사민주의를 일부라도 구현하려면 사회주의 세력이 형성되어야 한다. 사민주의자들이 사회에서 가장 급진적인 세력으로 여겨지는 한 사민주의는 절대 구현될 수 없다. 한국에서 자유주의 세력이 집권한 것도 그들보다 급진적인 세력, 즉 사민주의 세력이 수면 위로 오르기 시작하면서임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한국 사회는 그런 간단한 이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말께나 한다는 사민주의자들 중엔 유럽 물을 먹은 사람들이 많은데 한국에서 80년대에 한껏 급진화되었던(레닌주의 혹은 스탈린주의까지) 사람이 유럽 사회를 체험하면 자극을 받는 게 당연한 일이다. 사실 북유럽 사회, 아니 서유럽 사회만 하더라도 한국과 비교하면 얼마나 훌륭한가. 그 사회를 보면서 내 평생에 이만큼만 되어도 얼마나 좋을까, 나는 이런 것도 모르고 사민주의를 비웃으며 소련 따위 사회에 경도되었구나 얼굴을 붉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생각은 사민주의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피상적인 이해지만, 여전히 급진적인 좌파에 대한 냉소나 회의로 이어지기 쉽다.

과거 자신의 관념적 편향과 그에 대한 자괴감이 여전히 급진적인 '촌스러운' 사람들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는 건 얼마간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혐오의 씨앗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발현되는가는 결국 그 사람의 인격과 지성에 달려있다. 가장 훌륭하게는 깊은 성찰을 통해 그런 혐오를 잠재우고 여전히 급진적인 좌파들의 진정성을 존중하며 그들의 존재가 자신의 소망하는 사민주의의 구현에 밑거름이 된다는 점을 인정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렇지 못한 사람도 꽤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진중권 씨처럼 자신보다 급진적인 모든 좌파의 존재 자체를 공공연하게 부인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진중권 씨가 자신보다 급진적인 좌파의 존재 가치를 부인하면서 드는 가장 큰 이유는 대략 두 가지다. 낡고 비현실적이라는 것. ‘지금은 디지털 시대인데 한국의 좌파들은 농경 시대나 중공업 시대의 사고를 고수한다’ ‘존재하지도 않는 노동자 계급과 이미 폐기처분된 사회주의를 버리지 않는다’ 진중권 씨가 기회만 되면 반복하는 이야기들이다. 나는 한국의 좌파들이 낡고 비현실적인 경향을 갖는다는 데 일부 동의한다. 그러나 낡고 비현실적인 것은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매우 경박한 것이다. 낡고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을 극복하는 힘과 가치가 들어있는 것도 있고 더할나위없이 세련되고 현실적이지만 현실을 더욱 미궁으로 빠트리는 것도 있다.

오늘 자본주의 사회가 농경 사회도 중공업 사회도 아닌 디지털 사회로 접어들었다는 이야기는 누구도 굳이 부인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나 역시도 이메일과 구글톡을 가장 주요한 소통 수단으로 삼고 있고 강연 등으로 늘 전국을 돌지만 어딜 가든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에 상시 접속한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마치 SF영화에 들어와 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디지털 시대를 형유하기 위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시장에서 생존하기엔 약점이 너무 많은 고래가그랬어의 발행인이기에 그런 디지털 도구들을 좀더 적극적으로 부리면서 그런 약점들을 극복하려는 것이다.

중요한 건, 우리 삶의 이런 변화가 짐승과 다름없이 살던 인간이 불을 발견하고 도구를 사용하게 되는 변화처럼 인류 문명의 정상적인 발전의 산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렇게 세상이 뒤집혔다고 말할 정도로 디지털화하여 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자본의 경쟁의 결과다. 그 경쟁의 결과로 자본은 점점 더 인간의 삶과 행복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는 첨단 상품들을 시장에 내놓을 수밖에 없고, 그걸 구매하지 못하면 뒤쳐지고 가난한 것처럼 느껴지도록 선전하면서 무한경쟁 무한증식 하는 게 디지털 시대인 것이다. 디지털화가 가속되고 있다는 건 자본의 무한경쟁과 무한증식이 더욱 가속화, 거대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 자본의 무한경쟁과 무한증식을 위해 만들어진 그런 상품들을 거부하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회 체제 안에서 회사를 다니고 월급을 받아 사는 대개의 사람들이 그런 운동을 실천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결국 대개의 우리가 디지털 사회에서 현명함을 잃지 않는 방법은 그런 디지털 문명의 장점들을 자본의 체제에 반하는 활동과 좀더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생산에 최대한 활용하면서,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가치들이 자본에 독점되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공유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디지털 시대’니 뭐니 따위 자본이 대중을 현혹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을 되도록 ‘사용해주지’ 않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라는 구호가 가진 가장 사악한 측면은 마치 디지털 세상엔 종래의 계급적 억압이나 착취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게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자신이 한국의 거의 유일한 디지털 시대의 좌파임을 자임하는 진중권 씨는 ‘노동자 계급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나야말로 그랬으면 정말 좋겠지만 정말 오늘 현실엔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가? 정말이지 참새 껌씹는 소리다. 이를테면 양극화가 심각하다, 라는 말은 박근혜 씨도 하는데 그 말은 곧 ‘계급적 격차가 더욱 커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양극화라는 말은 누구나 하면서도 계급이라는 말을 하면 이 사람은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이군, 80년대 스타일이군 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디지털 시대를 향유하고 있다는 환각 속에서 자본의 부속품으로 전락해간다. 무서운 대중조작이다.

물론 70년대나 80년대의 노동자 계급이라는 개념을 오늘 그대로 적용시키긴 어려운 부분이 있다. 노동의 형태도 산업의 구조도 많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자본의 정규와 비정규 분리지배 전략도 고전적인인 의미에서 노동자계급을 말하기가 어렵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 계급이 사라져버렸거나 자본과 노동의 대립이라는 자본주의의 뼈대 자체가 달라진 건 아니다. 쉽게 말해서 디지털 시대엔 계급이 사라진 게 아니라 계급의 양상이 변화한 것이며 자본의 억압과 착취가 사라진 게 아니라 억압과 착취의 양상이 달라진 것이다.

좌파에게 중요한 건 농경시대인가 중공업 시대인가 디지털 시대인가가 아니라 인간의 인간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존재하는가, 소외된 노동이 존재하는가, 이다. 농경시대든 중공업 시대든 디지털 시대든 디지털 할애비 시대든 계급적 억압과 착취가 존재하는 한 좌파의 임무는 그것과 싸우며 그런 억압과 착취가 없는 세상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가장 세련된 좌파는 ‘디지털 시대엔 계급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의 계급적 억압과 착취의 양상을 꿰뚫어보며 그것에 현혹되지 않고 싸우는 사람이다.

'디지털 시대'의 진실은 삼성전자 서비스 차량에 적힌 ‘디지털 노마드’라는 구호와, 먼지 하나 허용하지 않는 청정한 삼성반도체 공장(디지털의 꽃을 생산하는)에서 백혈병으로 죽어가면서도 산재 판정조차 받지 못한 어린 여성노동자들의 피눈물의 대비 속에, 들어있다. (계속)





진중권 씨는 한국의 좌파들이 비현실적이라고 말한다. 그가 자신보다 급진적인 좌파를 비난할 때 가장 애용하는 단어인 “닭짓”이라는 말도 바로 그 비현실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아무래도 진중권 씨는 좌파가 뭔지 모르는 것 같다. 좌파는 원래 비현실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좌파는 어지간히 양식있는 자유주의자들조차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 접고가는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고 부여잡는 사람들이다. 좌파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진중권 씨가 말하듯 ‘폐기된 이념적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어서가 아니라 그 ‘어쩔 수 없는 현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때문이다. 죄없이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이렇게 편해도 되나하는 불편한 마음이야말로 좌파의 출발인 것이다. 그리고 그 불편한 마음을 기부나 자선 같은 한줌의 동정심으로 '해소'하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변화시키려 '행동'하는 것, 그게 좌파의 내용이다.

그래서 도무지 해결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문제에 비현실적으로 매달리는 것이다. 양식있는 사람들이 김대중 노무현 씨가 이명박에 비해 얼마나 훌륭했는가를 말할 때, 굳이 그들의 한계와 기만성을 말하는 것 역시 강퍅하고 비현실적이어서가 아니라 김대중 노무현 씨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고 접고 간 현실 속에서 고통받은 사람들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 고통이 나나 내 식구에게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외면하는 건 인간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80년대엔 진중권 씨가 말하는 이념적 도그마에 사로잡힌 좌파도 많았다. 진중권 씨 본인도 그런 좌파였 듯 말이다. 그러나 이젠 그런 좌파들은 더 이상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공장 정규직 노조와 그를 기반으로 한 직업적 좌파들을 빼고라면, 적어도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 그런 좌파들은 다 떠났다. ‘극우세력이 강한 한국적 상황에선 자유주의가 좌파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자들과, 입만 벌리면 좌파가 얼마나 낡고 비현실적인지를 선전하는 ‘세련되고 현실적인’ 좌파 덕에, 그들의 활동은 대중들에게서 미디어에서 거의 전적으로 무시되었다. 그런 엄혹한 상황을 버텨낸 좌파들은 이념적 도그마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 가운데 제 생애 안에 자본주의 체제가 무너지리라 철석같이 믿는 사람도 없다. 그들이 여전히 급진적 좌파인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마저 떠나면 ‘어쩔 수 없는 현실’은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지만 어찌됐든 그들은 ‘어쩔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함께하는 유일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진중권 씨가 경비행기를 소유하고 있고 “필리핀에 한 3년 비행기 타러 간다”고 할 정도의 생활을 하는 걸 두고 ‘좌파가 그럴 수 있는가’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좌파가 자신의 양식에 근거하여 고통받는 사람들과 삶의 격차를 되도록 줄이려 노력하는 건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걸 뒤집어 뭘 하면 좌파 자격이 없고 몇평 이상 살면 좌파가 아니고 식으로 비난하는 건 부당하며 매우 위험한 일이다. 나는 진중권 씨에 대한 그런 비난에 분명히 반대한다. 그러나 좀더 안락한 환경에서 활동하는 좌파가 온세상의 무시와 경멸 속에서 버텨내는 좌파에게 보여야 할 예의 는 있지 않을까? 그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내가 좀더 안락하게 활동할 수 있음에 대해 당연히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이념이고 운동이고 떠나서 인간이 인간에 대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 말이다.
 
그들이 세련되지 못하고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보인다면, 안 그래도 좌파가 무시되는 현실 속에서 그런 결점들이 행여 대중들에게 부정적으로 비쳐질세라 염려하면서, 그들이 좀더 세련되어질 수 있도록 좀더 효과적으로 현실과 접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오히려 좌파는 낡고 비현실적인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를 온세상에 전파하며, 유일하게 세련되고 현실적인 좌파를 자처하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

알다시피 한국 사회는 반세기 동안 극우반공주의 세력이 사회를 장악하며 좌파를 말살해왔다. 극우반공주의 세력의 반공주의적 선전은 좌파를 ‘뿔 달린 괴물’로 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화가 진행되고 시민의식이 높아지면서 한국의 반공주의는 그 양태가 바뀐다. 조갑제 류의 반공주의는 여전히 추악하게 느껴지지만 더 이상 새로운 효력을 갖지 않는다. 이제 좌파는 ‘뿔 달린 괴물’이 아니라 ‘쓸모없는 사람들’로 선전된다. 진중권 씨가 늘 말하듯 좌파는 ‘80년 운동권의 화석’이며 ‘이미 존재하지도 않는 계급에 매달리는 사람들’이며 급진적인 사유와 상상력은 ‘비현실적이고 어리석은 짓’이라는 등의 이야기들 말이다.

그런 이야기를 극우인사가 하는 것보다는 젊을 때 좌파 이력을 가진 자유주의자가 하는 게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현재 좌파를 자처하는 인사가 하는 게 훨씬 더 효과적이다. 그래서 좌파는 문제가 있어도 서로 비판하고 토론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비판과 토론이 없으면 썩게 되어 있다. 당연히 비판하고 토론하되 그런 비판과 토론이 행여 반공주의에 악용되지 않도록 신중하고 사려깊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오늘 모든 좌파들은 노선을 막론하고 적어도 그 정도의 분별력은 갖고 행동하고 있다. 아마도 단 한 사람을 빼곤 말이다. (계속)


 

어떤 이들은 내가 오류와 희망에서 ‘대중성’ 보다는 ‘좌파 정체성’이 더 중요하다고 '근본주의적으로' 주장하고 있다고 오해하는 듯한데, 실은 그 반대다. 이를테면 “선거에서 연 이은 실패의 주요한 원인이 대중성 강박으로 인한 프레임 오류”라는 내 말은 ‘대중성을 좇느라 좌파적 정체성이 훼손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잘못된 대중성 추구로, 즉 최소한의 정체성조차 포기해버림으로써 대중성을 잃었다’는 말이다. 체제 안에서 활동하는 정당에 ‘선거에서 연 이은 실패’보다 더 ‘대중성의 위기’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국면이 있겠는가?

현재 상황은 진보신당이 ‘대중적 실용노선’에 성공하여 엄청 잘 되고 있는데, 내가 까탈스럽게도 그 정체성이 흐려지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는 게 아니다. 분명히 밝히자면, 나는 오히려 현재 진보신당으로선 정체성이 위험하지 않은 수준으로 흐려지더라도 일단 유의미한 수준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내가 문제 삼는 건 ‘대중적 실용노선’이 아니라 ‘실패한 대중적 실용노선’이다. 진보신당이 “진중권 씨를 비롯한 진보신당 당적의 자유주의자들”의 주도로 추구해온 ‘대중적 실용노선’이 매우 대중적인 듯 보이지만 전혀 대중적이지 않으며, 매우 실용적인 듯 보이지만 전혀 실용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음을 ‘좌파의 일원’으로서 환기한 것이다.

며칠 전 진보신당 당원인 한 고등학생에게서 편지를 받았다.(전문은 여기에) 그는 진보신당이 대중성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대중들에게 진보신당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고 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자유주의 세력의 위선'을 폭로해 나가는 게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한겨레 칼럼에서, 노회찬 당시 후보가 서울시장 선거 직전 토론회에서 하신걸 보고 비판하신 거에 백번 공감하는 편입니다. 그러니깐, 우리는 한나라당을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민주당과 같은 편인 것도 아니라는 걸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그런 거요.”

그의 말에 내가 진보신당에 하고 싶은 모든 말이 들어있다. 좌파는 물론 이명박을 반대하며 이명박과 싸운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그 싸움의 성과는 모조리 자유주의 세력이 차지하게 된다. “우리는 한나라당을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민주당과 같은 편인 것도 아니라는 걸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그런 거”가 중요한 것이다. 사실 노회찬, 심상정 씨가 '고작'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한국사회는 여전히 대중적 인지도가 선거 결과를 좌지우지 하는 사회다. 특정한 사람을 거명해서 안 됐지만, 지난 선거에서 국회의원이 된 유정현 같은 사람은 국회의원이 될 어떤 활동이나 이력이 없는 ‘연예’ 아나운서였다.

그런데 노회찬 심상정 씨처럼 대중적 인지도가 높을 뿐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신망이 높은(한국 정치인들 가운데 최고 수준이 분명하다) 사람들이 고작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진보신당 후보이기 때문이다. 진보신당이라는 당이 왜 굳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대중들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두 사람이 민주당 소속이었다면 이미 몇 선을 거듭하며 강력한 대통령 후보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다.(‘강력한 대통령후보 노회찬’ ‘박근혜를 압도하는 여성 대통령 후보 심상정’, 생각만으로도 기분 좋지 않은가?)

촛불 광장에서도 두 사람은 한나라당은 물론 민주당의 정치인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망이 높았다. 그들은 반이명박의 스타였다. 그러나 그들은 ‘왜 이명박을 반대하는지’ 대중들에게 설명하는 데 성공했지만 ‘반이명박의 대안이 왜 민주당이 아니라 진보신당인지’를 설득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다.

평범한 한 사람이 진보신당을 지지하게 되는 과정은 두 단계로 이루어질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이명박을 반대하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이명박을 반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민주당 지지를 넘어 굳이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조차 이르지 못한 사람이 진보신당을 지지할 가능성은 전무하니, 관건은 두 번째 단계다. 두 번째 단계를 만들어내는 건 진중권 씨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상식의 회복’이 아니다. 물론 ‘상식의 회복’이라는 구호는 어떤 좌파적 구호보다 훨씬 ‘대중적’이지만 대중들을 첫 번째 단계에 만족하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진보신당이 대중들에게 해야 할 말은 ‘상식의 회복’이 아니라 ‘상식의 회복만으로는 부족하다’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라는 ‘상식을 가진’ 자유주의 정권이 서민대중의 편이 아니었음을 대중들은 분명히 기억한다. 그러나 자유주의 세력은 ‘상식조차 없는’ 이명박과 자신들의 차이를 끝없이 부각함으로써, 즉 ‘김대중 노무현만큼이라도’라는 선전을 거듭함으로써 반이명박 정서를 모조리 독식해왔고 지금도 그렇다. 그들이 지난 지방선거에서 대승한 것도 오로지 그 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진보신당은 뭘 해야 할까? 이 고등학생의 말대로 “자유주의 세력의 위선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걸 폭로하지 못하면 죽 쒀서 개주는 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오류와 희망에서 지적하고 이 고등학생이 언급한 노회찬 씨의 서울시장 선거 직전의 인터넷 토론회는 ‘프레임 오류’의 극치였다. 선거를 한참 남긴 상황이라면 모를까, 선거 직전 아닌가. ‘한명숙이 아니라 노회찬이어야 하는 이유’만을 강조해도 모자랄 판에 줄창 ‘오세훈을 막아야 하는 이유’만 떠들어댔으니, 노회찬을 고려했던 사람들조차 ‘한명숙에게 표를 몰아주어야 한다’고 결심하게 만드는 토론회였던 셈이다. 물론, 토론회 자체는 진중권 씨의 독설과 재담으로 매우 ‘대중적’(!)이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민노당처럼 일찌감치 자유주의 세력에 줄을 서서 개평이라도 얻지 뭐 하러 독자 출마를 하는가? 이게 고도의 정치공학이 결부된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인가? 이게 ‘대중성을 잃더라도 좌파적 정체성을 사수하자!’는 근본주의적 주장인가? 농담이 아니라, 상황 설명만 있다면 고래가그랬어를 보는 초등학생들도 할 수 있는 간단한 계산이다.

그런 간단한 계산조차 안 된 ‘대중적 실용노선’이 오늘 진보신당의 위기를 만든 것이다. 그런 ‘대중적 실용노선’이 ‘왜 민주당이 아니라 진보신당이어야 하는지’를 대중들에게 설득하는 데 실패하게 하게 한 것이다. 노회찬, 심상정 씨의 한국 정치인 최고 수준의 대중적 인지도와 신망을 재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노회찬 심상정, 훌륭하고 능력 있는 정치인들이지만 이명박을 막으려면 그래도 민주당을 찍어야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당시엔 욕도 했었지만 이명박과 비교하면 얼마나 훌륭한 대통령이야!”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대중성 강박으로 인한 프레임 오류”라는 내 말은 바로 그런 이야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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