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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청준 타계, 고인의 명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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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가해 2008. 7. 31.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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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임형의 남도문학기행>




'당신들의 천국'·'서편제'소설가 이청준 타계









작가는 독자와 싸워야 한다
소설가 이청준을 만나다
2007.04.25 / 강유정(문학평론가 겸 영화평론가)

소설가 이청준은 영화의 친구다. 불후의 명작인 <이어도>를 비롯, <서편제> <천년학>까지 그의 소설은 영화감독들에게도 창작의 영감을 제공했다. 활자예술이 사멸해가는 시대, 문학계의 거장이 들려주는 문학과 영화,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청준 선생을 처음 뵈었던 건 오 년 전쯤 청강생으로 도둑질 수업을 들었던 한 교실에서였다. 정규수업이 아닌 특강이었는데, 청강생임에도 불구하고 난 가장 앞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었고 술잔을 나누며 늦도록 대화를 나눴다. 그날 선생으로부터 많은 걸 훔쳤다. 벌써 5년 전 일이다. 5년 만에 다시 이청준 선생을 용인 자택으로 찾아가 만났다. 그때보다 조금 야윈 듯했지만, 모습은 여전하셨다. 오후 4시에 시작한 인터뷰는 와인과 맥주, 소주 등 주종을 옮겨가며 10시쯤 돼서야 끝났다. <천년학>에서 과거의 기억이 담긴 주막에 들른 동호(조재현)가 용택(류승룡)과 술과 대화로 밤을 밝혔듯이 선생과의 대화도 그윽하게 깊어졌다. 도무지 끝을 내기 어려웠다. 남도식으로 차려진 정갈한 저녁식사까지 얻어먹은 그날, 또 한 번 빚을 졌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이 계신 용인 자택은 곳곳에 놓인 김선두 화백의 그림처럼 단정했고, 들렀던 여행지 곳곳에서 가져온 돌마저 다정해 보였다. 쉬엄쉬엄 농담하듯 건네는 말 한마디엔 동시에 문화예술계에 던지는 날카로운 혜안이 담겨 있다. 선생에게 엿듣고 배운 그날 저녁을 옮긴다.

영화와 소설 사이

최근 이청준 선생은 영화 각색에 처음으로 손을 대셨다. 당신이 쓰신 <선학동 나그네>를 원작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이 선생이 각색한 작품이다. 선생은 이 영화의 원작자이자 각색자인 셈이다. 각색뿐 아니라 임권택 감독과 작품 안팎으로 교감을 나누셨다. <천년학>에 쏟아지고 있는 '100번째 노작'이라는 찬란한 상찬은 이처럼 영화에 참여한 거장들의 이름 때문에 그 무게를 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체 예술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영화와 소설 간의 차이는 뚜렷하다. <천년학> 역시 <선학동 나그네>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생애 최초로 각색 작업에 참여한 소회, 그리고 영화와 소설 사이의 매체적 차이에 대해 이청준 선생은 뚜렷한 자기주관을 자기고 있었다.

<천년학>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기술시사 때 영화를 봤습니다. 우리는 잘 몰라요. 아마 너무 가까운 곳에 있던 사람들인지라 뭐라 평하기는 어렵죠. 작품 속에 밀착돼 있고 빠져 있었기 때문에 도리어 제가 쓴 원작 소설에 대한 감각이 무뎌지더군요. 내 원작에 저런 인물이 있었던가, 아니면 저런 사건이 있었던가, 라는 생각까지 들더란 말이지요. 제 원작과 구분도 잘 안 되고 어떤 것이 먼저였나 가물거리더군요. 그래서 다시 제 소설을 읽어 보았지요.

원작을 제공하긴 하셨지만 시나리오 각색 작업을 하신 건 처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각색은 처음 해본 일입니다. 각색도 실은 제 몫이 아닙니다. 각색이라 하지만 실상 저는 감독에게 모티브를 제공한 게 다라고 볼 수 있겠지요. 원작과 작품의 관계란 게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처음 출발은 아마도 원작과 영화의 대결일 거라고 봅니다. 영화는 원작에서 느낀 감흥이나 감동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려고 합니다. 영화라는 완전히 다른 매체를 통해 새롭게 재조명하고 창조해내려 하죠. 그래서 '대결'입니다. 원작을 넘어서는 감동과 다른 지점을 만들어내려고 하는 거죠. 저 역시 그 방식이 옳다고 봅니다. 영화가 원작을 넘어서 새로운 감동을 만들어줄 때 원작은 또 한 번 재해석되고 생명을 얻게 되지요. 원작자도 실은 그 넘어서는 순간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시작은 경쟁과 대결이었지만 원작자는 운명적으로 영화를 지지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영화화된 작품을 통해 원작 자체가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결국 원작자는 감독을 도와주려고 합니다. 감독이 원하는 목표점에 도달하도록 도와주는 거지요. 하지만 감독을 지배하려 해서는 안 되죠. 감독에게 조언을 하고 감독이 설정한 상황에 가장 적합한 도움을 주는 것이죠. 원작자는 영화 속에 큰 의미가 없습니다. 어차피 영화화되고 나면 그것은 아예 다른 작품이니까요.

<천년학>은 원작과는 많이 다릅니다. 마치 판소리의 더늠처럼 말입니다. 가창자에 따라 달라지는 판소리 판본처럼 임권택 감독이 재해석한 <선학동 나그네>에는 여러 관계가 덧붙여졌습니다. 동호의 아내 단심이라던가 송화의 출신이 제주라는 사실, 4.3항쟁과의 연관성은 새로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소설은 감상의 시간이 무한대로 주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영상매체는 감상이 압축된 시간에 제한돼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대사도 압축되고 모든 상황이 이미지 위주로 흘러가게 됩니다. 만일 영상이 준 것을 대사가 한 번 더 강조하면 그건 반복이고 중언부언으로 보이죠. 말 그대로 소설과 영상은 아예 다른 매체입니다. 어차피 영화가 소설을 베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달라질 수밖에 없죠. 그런 점에서 단심이는 영화적으로 꼭 필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작품이든 영화화되면 갈등이 선명해지기 위해 제3의 인물을 필요로 합니다. 단심이도 그런 인물이지요. 둘의 관계의 안타까움이나 상황을 제대로 설정하기 위해서는 그런 인물이 있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4.3사건은 특히 임권택 감독이 애착을 가진 부분입니다. 사회사적인 내용에 감독이 애착을 가진 것이지요. 편집과정에서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습니다. 4.3사건 역시 영화이기에 필요한 장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송화의 출생은 소설에서 그다지 중요한 조건이 아니지요. 하지만 영화는 다릅니다. 게다가 송화가 제주까지 가게 된 필연성이기도 하죠.

<선학동 나그네>는 사랑이야기라기보다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깊은 골과 한에 대한 작품이었습니다. 듣고 보니 <천년학>은 사랑이야기로 무게 중심이 옮긴 것 같습니다.
네, 맞습니다. <천년학>은 혈연관계의 사랑이라기보다 두 남녀의 애정에 중심을 옮긴 사랑이야기이지요. 많은 젊은 관객들이 왜 둘이 만났다 헤어짐을 반복하는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감상들을 이야기하더군요. 제가 생각하기에 그들이 만나지도 헤어지지도 못하는 것은 바로 삼분의 일쯤 남은, 혈연이라는 관계의 앙금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남남이지만, 그러니까 형제처럼 자라난 한때가 있기 때문에 서로를 남녀로 완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는 거지요. 저는 이 길항관계가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삼분의 이만큼 서로를 끌어당기는 이성의 힘을 나머지 삼분의 일의 저항감이 망설이게끔 하는 거지요.

임권택과의 대화

<서편제>에 이어 <천년학>까지 임권택 감독과 이청준 선생의 교감이 영화로 표현됐다. 현장에서 그들은 주변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둘 만의 대화법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한다. 한 분야에서 높은 경지에 오른 어른들이 함께한 <천년학>은 아마 한국 영화사상 다시 보기 힘든 문화예술계의 합작품일 것이다. 문학과 영화라는 매체상의 차이는 뚜렷하지만, 이청준이 쓰고 임권택이 찍은 세계는 삶과 죽음, 소리, 인생에 대한 묵직한 성찰을 담고 있다. 원작과 각색자로서 이청준 선생이 바라보는 <천년학>, 그리고 임권택의 영화가 지닌 힘은 무엇일까?

결국 <남도소리> 연작을 영화화한 두 작품 <서편제>와 <천년학>에서 중요한 것은 '소리'인 것 같습니다. 소리와 길, 이 두 가지가 남도소리 연작과 영화의 주제를 압축하고 있을 텐데요.
<천년학>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바로 그 부분입니다. 그런데 판소리와 길이라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듯싶어요. 소리라는 것은 말입니다. 자신의 결핍이나 한, 서러움을 한 데 뭉쳐 여기저기 흩뜨리고 다니는 행위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아픔이나 고통을 당하면 우선 그것을 읊습니다. 논 매면서 밭 매면서 물레질하면서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의 흔적을 중얼중얼 읊어내지요. 그게 바로 타령입니다. 노느니 염불한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핍과 상처를 중얼중얼 풀어내는 것, 그렇죠. 풀어내는 겁니다. 한이라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아픔과 고통을 푸는 것, 삭이는 것이 바로 이런 행위들입니다. 물론 이야기로 푸는 것, 소설을 쓰는 것은 이런 행위들이 좀 더 세련화된 예술양식이지요. 중요한 것은 예술화되기 이전에도 이런 한을 푸는 방식들이 상당히 내면화돼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판소리라는 것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설움과 한, 결핍을 푸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삭임의 과정이 나누는 것이며 퍼뜨리는 것입니다. 영화 <천년학>에서 판소리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송화와 동호의 말 못할 사정들을 삭이는 과정이 바로 이 판소리에 속해 있는 것이지요. 아마도 임 감독의 의도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송화는 자신의 소리가 가진 결핍, 아버지가 끝내 이루지 못한 꿈의 아픔, 가족이자 연인인 동호와의 엇갈림이 준 상처, 이런 것들을 모두 소리로 녹여냅니다. 여러 번 부르고 반복할수록 그 상처와 한이 삭는 것이지요. 영화는 이 과정들을 표현해낸 것이라고 봅니다. 판소리 장면이 너무 많다는 반응들도 있더군요. 그런 평가를 들을 때 저는 이런 면을 간과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선학동 나그네>를 <문학과 지성>에 발표하신 해가 1979년입니다. 30년이 가까운 세월이 지났습니다. 어떻게 달라지셨을까요?
처음 소설을 발표했을 때 평론가 김현이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두고 이런 말을 했지요.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살을 보았다'라고 말이죠. 김현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자살이더군요. 둘은 영원히 만나지 않고 그곳에서 비상학이 나르니 말이죠. 그 이후에 전 <선학동 나그네>를 이어 <새와 나무>를 썼습니다. 내용은 이어질 수 있으되 인물이나 사건은 다를 수 있다는 연작의 특성을 십분 활용한 것이지요. 영화화되면서는 중요한 부분이 달라졌습니다. 원작에서 둘의 갈등은 반쯤 혈연이 섞여 있다는 데서 강화되죠. 우리가 아주 어렸을 때는 혈연지간의 정과 이성간의 사랑을 혼동하기도 하지요. 어느 시점까지 그 혼동이 계속돼요. 동호와 송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르다면 원작에서는 혈연간의 정이 삼분의 이, 이성의 애정이 삼분의 일이죠. 이성간에 생길 수 있는 감정을 쫓기에는 반반씩 섞인 혈연이라는 끈 때문에 저항감이 생깁니다. 혈연에 대한 그리움과 이성에 대한 그리움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 감정에는. 그런데 영화에서는 둘을 아예 혈연관계가 없는, 겉보기만 남매로 그려놨습니다. 이성간의 애정부분이 더 확장된 거지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지만 남매로 자랐기에 남매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러니까 영화 속에서는 남녀 간의 정이 삼분의 이, 혈연간의 정이 삼분의 일이죠. 그 비율이 바뀐 겁니다.

소설에는 '쑥대머리'를 부르는 장면이 있는데요. 영화에는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쉽기도 했는데요.
아, 그 대목은 임권택 감독이 아주 아끼는 것이지요. 이번 영화에서는 잠깐 서두만 떼는 데서 그치죠. 실은 그것은 여자가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그래서였을 거예요. 역시 쑥대머리는 임방울이 부르는 것이 최고 윗길입니다. 한 곡조 들으면 바로 삭신이 노곤노곤해지죠. 결국 소리라는 것은 길, 주막, 포구의 이미지와 같은 작용을 합니다.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작품이라는 점에서 많은 주목과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임 감독님이 선생님의 작품을 영화화한 게 벌써 세 번째입니다. 살펴보니 영화화된 선생님 작품들은 모두 임권택 감독님 작품인데요. 두 분의 인연이 어떻습니까? 호흡이 잘 맞는가요?
실상 임권택 감독과 나 사이에 호흡이라는 말은 적절치 못합니다. 우선 저보다 연배가 다섯 살이나 위이지요. 그러니까 그런 관계가 설정될 사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아마도 동향이라서 정서의 공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판소리나 흰소리, 반어법 이런 것들 말입니다. 임 감독과 전 주로 놀리듯 심통 부리듯 반어법으로 대화합니다. 주변사람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나, 잘 모를 정도지요.(웃음). 그런데 그 반어법 속에서 오히려 깊은 대화가 가능해집니다. 서로를 읽어내려고 애쓰고 읽어내지 못한 부분은 또 접어두고 이해하려 하기도 하지요. 그런 관계, 아마도 그런 관계겠지요.

저는 백사가 죽는 장면이 너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매화꽃이 떨어지는데 송화는 노래를 부르고, 백사는 죽음을 맞죠. 눈물이 나더라구요. 선생님은 어떤 장면이 가장 좋았나요?
매화꽃이 떨어지는 장면은 압권이지요. 그 장면의 에너지는 만만치 않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우리 나이가 되면 누구나 죽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요. 죽음을 생각해본다는 거죠. 처음 그 장면 찍을 때 많은 대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대사가 필요 없더군요. 소리가 주인이 돼버린 겁니다. 백사를 맡은 장민호 씨가 죽음을 연기하는데, 대단하더군요. 눈 깜박임 하나 정도로 죽음과 삶의 경계를 가뿐히 넘나듭디다. 제가 옆에서 보았을 때, <천년학>은 많은 부분을 아끼는 작품입니다. 대사나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속에서 대사는 간단한 정보일 뿐입니다. 저 역시도 감독에게 그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걸 화면으로 이야기하고 그래도 안 되는 부분에 대사를 주겠다고 말입니다. 아끼고 단속하는 전반적 분위기 속에서 영화는 잔잔히 흘러가지요. 그래서 영화가 차갑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이 죽음, 이 장면만큼은 폭발적인 힘을 내뿜습니다. 조용한 정적 속에서 죽음이 뜨겁게 연출되지요. 영화 속에서 이런 장면들이 몇몇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동호와 송화가 헤어질 때 그리고 동호가 송화를 위해 집을 지어놓았을 때, 하지만 감독은 이 세 부분 모두가 아니라 매화꽃 장면에 집중했습니다. 이 부분을 위해 다른 장면들을 조금씩 축약시켰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서 그 장면이 더 빛을 발하는 듯도 싶네요.

선생님의 단편 <벌레이야기>도 죽음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김현 선생은 이 소설을 "이청준의 상상력이 가장 높이 솟아오른 작품"이라고 평했습니다.
우주 속에서 한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된다고 여겨질 때, 그때 한 인간이 벌레가 됩니다. 때론 신조차도 한 사람을 벌레로밖에 취급하지 않는구나, 라고 좌절할 때가 있어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벌레처럼 처참한 순간이 되면 섭리자를 찾게 됩니다. 그런데 그 섭리자마저 그를 외면할 때가 있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이 아무리 세계를 파괴하려 해도 소용없습니다. 이 때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썩어서 세계를 오염시키는 거지요. 세계와의 대적이 아니라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세계의 일부를 고장 내는 거지요. 그게 '벌레이야기'입니다.

정보 과잉의 시대 

문학평론가 김현은 이청준 선생의 소설을 '비극적 현실주의'라고 말했다. 김현은 "이청준의 비극적 현실주의는 삶에 과연 의미가 있는가, 삶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를 탐색하는 탐색의 정신주의"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이처럼 세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요즘 문화예술계에서 사라진 미덕이다. 혹자는 본격 문학이 기를 못 펴는 시대라고도 한다. 유용성으로 생명을 얻는 가벼운 정보와 읽을거리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본격 문학은 고리타분한 과거 유산 취급을 받는다. 선생은 이를 "정보가 체험을 대체한 시대"로 규정한다.

소설이 많이 변했다고 합니다. 우리 세대 독자들에게 선생님의 작품은 교과서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최근 소설들을 많이 읽어보시나요?
김숨, 한유주 이런 작가들까지 읽습니다. 제가 소설을 쓸 때는 주로 체험을 통해 소설을 썼지요. 하지만 지금은 '체험'보다 '정보'가 더 우선 되는 것 같습니다. 체험보다 정보를 우선시 하다 보니 소설의 내용보다 스타일이 더 중요시되기도 하지요. 이 전의 소설들은 읽다가 그만둬도 계속 읽을 수 있는데 최근 젊은 소설가들의 작품들은 다시 처음부터 읽게 되더군요.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보니 그래도 내가 소설을 쓸 때는 참 좋았던 시절이구나 싶기도 합니다. 우선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없었다는 건 생물학적 의미가 아니라 우리에게 아버지는 싸워 이겨야만 할 그런 대상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가난했고 무지했고 힘들었던 아버지, 무력한 아버지였습니다. 작가들은 그런 아버지를 싸울 대상으로 전제하지 않았지요. 일방적으로 아버지의 이미지를 지배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대들을 보니 아버지가 너무나 완강합니다. 한편, 지금의 작가들에게는 정보가 너무 많습니다. 정보란 누구에게나 공유되는 것 아닙니까? 체험이야 각각의 다른 것들 개성이 있지만 정보는 너무 균등하기 때문에 각각의 색깔을 드러내기 어렵습니다. 평등한 정보 속에서 자기를 드러내는 방법은 그저 서술기법과 같은 형식상의 변혁일 수밖에 없습니다. 스타일의 혁신에 기댈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런 문학의 현실에 돌파구는 없을까요?
이젠 어차피 장르의 벽은 점점 무의미하고 희미해질 것 같습니다. 장르 간의 대화가 필요한 것이지요. 대화를 위해서는 소설이라는 장르 역시 자기 자리를 굳건히 해야 합니다. 자기가 없을 때 다른 장르와의 대화는 없죠. 다만 침투만 있을 뿐. 결국 소설은 삶에 대한 일차 정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옷의 소재가 되는 원단처럼 말이죠. 과거에는 소설의 원자재가 활자였고 언어였죠. 이제는 소설이 많은 다른 장르의 원단이자 원자재가 되고 있습니다. 재 가공될 수 있을 삶에 대한 일차 정보, 그것이 바로 소설인 셈이지요.

선생님의 소설은 주로 추리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이어도> <비화밀교> <가면의 꿈> 등등이요. <천년학>의 원작 <선학동 나그네>도 엄밀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추리구조를 즐겨 쓰시는 건 취향이신가요?
소설은 독자와의 싸움이고 게임입니다. 결국 소설가는 끝까지 자기의 패를 보여주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또한 삶의 대결이기도 하지요. 소설이라는 창작 작업은 독자와 게임을 벌이는 것이죠. 독자가 소설을 금세 읽어버린다면 그러니까 쉽게 정복된다면 재미가 없을 겁니다. 끝까지 마지막 패를 쥐고 독자와 게임을 벌이는 게 소설입니다. 독자도 자신의 삶에 대한 지혜를 총동원해서 작가와 겨루고 작가 역시도 마지막 패를 숨기고 자신의 지혜와 지식을 총동원합니다. 종합적으로 삶에 대해 묻는 것, 그게 바로 소설이니까요. 결국 독자는 기분 좋게 이 게임에서 승복하게 되지요. 적절히 서로의 긴장을 유지하는 것, 그게 바로 좋은 소설입니다.

사진 한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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