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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손호철 칼럼] 강남 좌파? 진짜 문제는 '강북 우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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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가해 2011. 4. 19.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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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칼럼] 영남이 계급분화해 '영남 좌파'가 생긴다면?


인간은 그들이 영위하는 사회적 생산에서 불가피하게 자신들의 의지와는 독립된 특정한 관계들 속에 들어간다. 즉 그들의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에 들어간다 (…)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서울대 조국 교수가 기폭제가 된 최근의 '강남 좌파' 논쟁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것이 인간의식의 존재구속성에 대한 혁명적 주장으로, 좌파이론의 초석이 된 맑스의 유명한 <정치경제학 비판>의 이 "서문"이다. 그렇다. '강남 좌파'라는 단어 뒤에는 강남으로 상징되는 부유층은 의식의 존재구속성 때문에 기본적으로 우파('강남 우파')라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즉 정치의식 등 인간의 의식은 자신이 속한 계급적 지위의 규정을 받는다는 '계급론적' 인식, '유물론'적인 인식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맑스의 테제는 기본적으로 맞는 주장이고 강남으로 상징되는 부유층은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우파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이
기계적으로 계급적 지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위의 기본 틀을 벗어나 강남이면서 정치적으로는 '좌파'인 강남 좌파가 분명히 존재한다(이 면의 2011년 3월 9일자 칼럼 "다시 진보를 생각한다(바로가기)"에서 지적했듯이, 현재 강남 좌파라고 불리는 세력은 대부분 '좌파'나 '진보'라기 보다는 '리버럴'이기 때문에 '강남 리버럴'이 정확한 표현이지만, 이 글에서는 현재의 논쟁구도를 고려해 강남 좌파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같은 강남 좌파의 존재가 마치 새로운
현상인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몰역사적인 상업주의로 문제가 많다. 사실 '강남 좌파의 원조'는 맑스 자신이다. 맑스의 위의 주장처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면 맑스는 우파가 됐어야 맞다(이 같은 사실 때문에 유명한 문화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은 맑스의 위의 구절을 "두고두고 망칙한 발견"이라고 논평한 바 있다). 그러나 맑스는 강남출신이면서도 좌파의 길을 갔다.

러시아 혁명도 마찬가지다. 러시아 혁명 주역 중 스탈린을 제외하곤 거의 모두(레닌, 트로츠키, 부하린 등)가 일종의 '강남' 출신이었다.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다. 한국 사회주의의 원조는 대부분 <태백산맥>에 나오는 기층 민중들이 아니라 일본유학을 다녀온 부유한 지주들의 자식들이었다.

1945년-53년의 격변의 해방 8년사를 지나 극우적인 반공국가가 자리 잡은 후도 마찬가지다. 이후 좌파운동은 사라졌지만 민주화운동, 그리고 취약하나마 진보운동을 주도한 것은 강남 좌파였다. 70년대 이후를 예로 든다면, DJ, YS로부터 재야지식인들, 학출(학생운동 출신 위장
취업 노동운동가들), 87년 6월 항쟁 당시 명동을 메운 사무직 노동자 등 운동을 이끈 것은 대부분 강남 좌파였다. 따라서 강남 좌파를 갑자기 생겨난 새로운 현상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서는 안 된다.

▲ 강남좌파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진짜 문제는 '강북 우파'에 있다 ⓒ연합

뿐만 아니라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진짜 문제는 강남좌파가 아니라 '강북 우파'라는 사실이다. 물론 강남 우파에 균열을 내고 강남과 부유층에서 좌파를 확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최근 유행하고 있는 강남 좌파라는 화두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인 강북 우파라는 문제를 은폐하고 있다.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면, 강남으로 상징되는 부유층이 우파이듯이 강북으로 상징되는 서민층은 자신의 계급적 지위에 의해 기본적으로 좌파이어야 한다. 즉 '강북 좌파'가 정상이어야 한다. 그리고 '강남 좌파'처럼 '강북 우파'는 예외적 현상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강남이 우파인 것은 맞지만 노동자,
농민 등 우리의 서민들은, 강북은 과연 '좌파'(그간의 논쟁의 맥락을 수용해 좌파가 아닌 '리버럴'을 포함한 매우 넓은 의미도 사용하더라도)인지 자신이 없다. 이와 관련, 주목할 것은 개인적으로 1년 여 전에 민주당의 정세균 체제가 추구했던 뉴민주당 플랜이라는 우경화된 노선을 비판하며 제시했던 1997년 대선과 2007년 대선의 계층별 투표행태 비교분석이다. 이를 다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계층별 투표
경향 비교(단위=%)
1997년 대선 2007년 대선
김대중 이회창 정동영 이명박
저소득층 51.9 36.1 15.3 72.5
중저소득층 43.7 37.1 17.8 65.5
중상소득층 39.8 40.8 28.9 56.5
상위소득층 41.1 40.4 30.2 62.3

한국선거학회, 대통령선거 여론조사 자료

위의 표가 보여주듯이 1997년 대선에서는 저소득층일수록 김대중 후보에게, 고소득층일수록 이회창 후보에게 투표해, 일종의 '계급투표'(정확히 표현해 '계층투표')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2007년 대선의 결과 전혀 다른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계급투표와는 정반대로, 가난한 사람일수록 우파 후보, 보수 후보(이명박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왜 이 같은 역전이 일어났을까?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집권 10년 동안 신자유주의 정책을 통해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서민들의 삶을 피폐화시켰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저소득층과 서민들이 오히려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냐", "부패가 무능보다 낫다"며 보수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다시 말해, 강남과 부유층은 기본적으로 우파이고 조국 교수와 같은 강남 좌파가 예외적이라면, 강북과 서민층은 오히려 자신들의 계급적 지위와 정반대로
다수가 우파라는 이야기이다. 강북과 서민층이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과 같은 '진보정당'내지 '좌파정당'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당과 같은 '자유주의(리버럴) 정당'에도 표를 던지지 않았다. 대신 우파 정당에 표를 던진 것이다(미국의 경우도 우파의 핵심기반은 부유층이외에도 저학력 저소득 백인 노동자들, 즉 '미국판 강북 우파'이다). 한 마디로, 강남만이 아니라 강북까지도 우파인 것이 우리의 문제의 핵심이다.

물론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일정한 변화(한나라당의 패배)가 나타났다. 그러나 그 같은 변화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보다 더 심한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의해 민생이 더 어려워지고 양극화가 더 심화되면서 '강북 우파'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긴 것이라고
해석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강북 우파라는 문제를 넘어 어쩌면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한국정치가 우파건 좌파건 계급정치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계층, 계급보다는
지역이 한국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한국정치의 핵심은 어쩌면 '강남 우파'보다는 '영남 우파'에 자리 잡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호남과 영남 모두 하층으로부터
재벌까지 계급을 초월해 자신들의 지역정당을 지지하는 '초계급적 지역정당체제'가 한국정치의 현실이다. 이 점에서 강남 좌파 확대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현재의 '초계급적 지역정당체제'를 (영남과 호남의 노동자, 서민들이 지역을 초월해 계급적 입장에서 진보세력을 지지하는) '초지역적 계급정당체제'로 전환시키는 것, 다시 말해, 영남이 계급적으로 분화해 '영남 좌파'가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강남 좌파가 나타나 강남의 부유층이 보수성을 벗어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보다 백배 중요한 것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서민층이 보수성을 버리고 정치적 진보성을 갖게 되는 것, 나아가 이들이 지역주의의 사슬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








오늘의 교훈,
자신이 딛고 있는 현실을 판타지로 만드는 미디어 장난질에 놀아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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