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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막내(35기) 기자 성명, 명문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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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가해 2010. 12. 31.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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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팔수를 거부한다'가 제목이 되도 무방할 듯합니다.




 

이하 성명 전문

저희들은 보도국의 막내 기자입니다. 지난 10월 입사한 37기 후배들이 있지만, 아직 수습 교육을 받고 있고, 현업에 투입되지 않은데다, 지방 근무와 직종 분리 등의 향후 일정을 고려하면 저희들이 실질적인 막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직의 막내로서 가급적 말을 아끼고 자세를 낮추려고 노력해왔습니다. 회사에 대한 의견을 표명하기 전에 먼저 온전한 기자로 성장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풋내기가 설친다는 냉소도 두려웠습니다. 저희들보다 먼저 의견을 표명한 34기 선배들의 용기에 감사함을 느끼는 까닭은 여기에 있습니다.

 

저희들이 막내 기자로 보내온 시간은, 한편으로 많은 의구심들을 억누르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의욕과 패기가 넘쳐야 할 수습기자 시절, 저희가 취재 현장에서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시민들의 경멸 어린 시선이었습니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를 취재하다 욕설을 들으며 쫓겨나는가 하면, 멱살을 잡히고 뺨을 맞기도 했습니다. 집회나 시위를 취재하기에 앞서 ENG 카메라에 붙은 KBS 로고를 떼어 내야 했던 참담한 상황도 겪었습니다. 의욕과 패기는 버거운 짐이었습니다. 의아함과 서러움이 뒤섞인 눈물을 쏟은 동기도 있었지만, 모두들 기자가 되기 위한 관문이라 믿으며 참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사장님께서 취임하신 뒤 그런 믿음을 간직하기는 더 어려워졌습니다.

 

공영방송이 가장 소중히 지켜야 할 가치는 공공성이라고 믿습니다. 공영방송 KBS는 국민이 공유하고 있는 재산의 일부이므로 권력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영역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KBS는 불행히도 권력의 확성기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저희들의 생각입니다. G20 정상회의를 홍보하는 데에만 주력했던 KBS 전파는 노동계의 우려나 해외 언론의 비판적 반응을 담지 못했습니다. 예산안 날치기를 왜곡 보도했다는 의혹에서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연평도 사격 훈련에 대한 일각의 우려는 국가 안보를 담보로 무시되었습니다. 민간인 불법 사찰과 UAE 파병에 대한 분석 기사도 누락됐습니다. 4대강 사업을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산 개조 꿈에 비유한 대통령의 발언은 즉시 소개됐지만, 사업의 문제점을 지적한 프로그램은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2주 동안 결방됐습니다. 결방 사유가 청와대의 압력 때문이라는 정황도 일부 드러났습니다. 청와대 직할 보도본부장이 내정됐다는 소문이 기정사실화 되어 거리에 나돌고 있습니다. 급기야 사장님께서 과거 청와대 고위 인사에게 방송장악을 다짐했다는 믿기 어려운 보도까지 나왔습니다.

 

저희들에게 더 힘든 것은 이 같은 문제를 지적하는 구성원들이 징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언론노조 KBS 본부와의 단협이 체결되자마자 사장님은 지난 7월 파업에 참가했던 조합원 60여명을 징계하기로 하셨습니다. 파업 참가자 천여 명 가운데 어떤 기준으로 60여명이 선택됐는지 아직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외부에 매체 비평 수준의 글을 기고한 중견 기자도, 사장님의 퇴진을 권고한 막내 피디도, 사내 게시판에 댓글을 단 누군가도 징계의 대상 혹은 후보가 되고 있습니다. ‘징계 플루’라는 말이 회사에서 떠돌고 있는 사실을 사장님은 아시는지 궁금합니다.

 

저희들은 사장님께서 30년 숙원사업인 수신료 인상을 위해 이 같은 악역을 자처하고 계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수신료 인상에 성공한 최초의 사장이 되기 위해 잠깐의 수모는 견딜 수 있다고 생각하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들은 사장님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수신료가 공영 방송의 정당한 재원이 되기 위해서는 그 공영 방송에게 주어진 공적 책무를 온전히 수행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정부에 비판적인 프로그램이 수신료 인상 국면을 이유로 결방된다면, 그 순간 수신료 인상의 정당성은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수신료 인상을 위해 공공성의 역할을 유보할 수 있다는 발상이야말로 수신료 인상의 정당성을 가장 심각하게 훼손한다는 사실을 언론학 박사인 사장님께서 모르실 리 없습니다.

 

사장님께서는 ‘특보 사장’이라는 말을 가장 싫어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호칭은 누구도 함부로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 같은 것입니다. 대통령 특보를 지낸 사장님이 KBS에 들어오심으로써 공영방송의 위상은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저희 막내 기자들은 모두 사장님의 취임에 몸을 던져 반대했습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공영방송을 지키겠다는 사장님의 취임사에 기대를 걸기도 했습니다. 사장님 취임에 반대했던 선배들도 저희들과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 저희들은 참담하게도 이 같은 기대가 무너졌다는 사실을 밝힐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정연주 전 사장 시절로 돌아가자는 얘기냐,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은 그 질문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세대입니다. 그 시간을 겪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KBS란 거대한 조직의 정치적 역학관계에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문제의식이 그런 식으로 왜곡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믿습니다. KBS 뉴스가 공정했다는 외부의 평가를 언급하고 싶어 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장님께서는 본인이 오랜 세월 몸담으셨던 보도국의 막내들에게도 이처럼 가혹한 평가를 받고 계십니다. 사장님을 가장 믿고 존경해야할 사람들에게 그같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사장님이 정말 깊이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조직이 가장 자랑스러워야 할 막내들이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책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사장님의 몫입니다. 국민들은 권력의 편에 선 공영방송을 외면하고, 직원들은 서로 징계를 받겠다며 사장님의 권위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 웃지 못 할 현실에 가늠하기 힘든 슬픔을 느낍니다. 이제 사장님은 결단하셔야 합니다. 그토록 사랑하신다는 KBS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장으로 남을지, 이 모든 책임을 떠안고 사퇴함으로써 존경받는 선배로 기억될지 선택하셔야 합니다. 저희들은 간절한 마음으로 사장님께서 명예롭게 퇴장하시기를 바랍니다. 반평생을 기자로 살아온 자부심을 마지막 순간까지 잃지 않으시길 희망합니다. 사장님께서 모든 짐을 내려놓고 KBS를 떠나시는 순간, 저희들은 온 마음을 다해 뜨거운 박수를 보낼 것입니다.

 

2010년 12월 30일 김소영, 김영은, 김영준, 김진화, 민창호, 박대기, 윤성욱, 장덕수, 정연욱, 하선아 등 35기 일동

<출처 : http://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26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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