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촛불과 민주주의

기록방

by 한가해 2008. 7. 22. 23:18

본문

직접민주주의?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기획 : 촛불에 미치다] 촛불과 민주주의


유영주 기자 www.yyjoo.net / 2008년07월22일 10시28분


촛불은 아직 진행형. 언제 어떻게 끝날까. 청계광장이 열린 첫날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단정하지 않는다. 한편에서는 어떻게든 진화(鎭火)하려 한다. 무시하기도 하고 겁을 주기도 하고 공격하기도 한다. 한편에서는 어떻게든 진화(進化)시키려 한다. 진단하기도 하고 기획하기도 하고 물 흐르듯 맡겨두기도 한다. 이렇게 촛불은 계속되고 있다.

지금 ‘촛불과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가 가능할까. 이 요란하고 역동적인 국면이 어떤 모양으로 일단락되느냐가 확인되지 않는 한 추정과 예측에, 주관적인 진단이 되기 십상 일지다. 그렇다고 정의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민주주의의 내용과 형식의 문제는 촛불 이전부터, 그리고 촛불이 켜진 이후에도 한시도 관심 밖의 일이 아니었다. 정치에 대한 시민의 관심만큼 촛불과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은 지속했다. 이 주제를 놓고 관심을 피력했던 활동가와 연구자의 발언을 쫓아봤다. 정의라기보다는 정리에 가깝겠다.

▲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촛불선언’(시민인권선언) 만들자?

 “광장과 거리에서는 직접민주주의 맹아들을 열심히 꽃피우고 있는데, 제 생각으로는 새로운 시민혁명이 진행 중인 것 같다. 이 시민혁명은 권리의 혁명이기도 하다. 대의제 민주주의로는 수렴될 수 없는 새로운 주권자가 광장에서 탄생하고 있다.”

박래군 인권활동가의 말이다. ‘직접민주주의의 맹아’라는 말 속에는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일정한 불신과 이를 보완하거나 대체할 뭔가의 희망사항이 포함돼 있다. 일단 ‘새로운 주권자’의 등장에 눈을 떼지 않는데.

박래군 활동가는 이 주권자들이 ‘시민인권선언’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래군 활동가는 “당장 제도정치로 수렴될 수 없는 급진적인 권리의 내용을 광장에서 서로 제안하고, 토론하고, 합의하여 어느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인권으로 확고히 선언하자”고 주장한다. 인권활동가다운 고민과 실천이다.

촛불에서 확인된 민주주의를 둘러싼 쟁점과 논란, 요구들을 급진적으로 정리하되, 대중의 동의와 감성이 살아있는 ‘선언’을 만들 수 있다면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 시민이 줄줄 외우는, 외우지 않아도 저절로 읊어지는 그런 짧고 간명한, 그러면서도 인민주권과 인민권력의 의지가 꼿꼿이 살아있는 선언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의 시민은 아직 6.29선언을 대체하는 선언을 갖고 있지 않다. 6.29선언에는 20년 전 6월 10일부터 18일간 ‘직선제’를 외쳤던 시민들의 정치적 열망이 오롯이 반영됐다. 선언의 주체는 지배자였고, 지배자의 입을 통한 선언이었지만, 지배자는 대중의 요구를 거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혁명이었고, 동시에 미완의 혁명이었다.

지금 촛불은 6.29선언을 대체하는 ‘촛불선언’ 탄생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만 ‘촛불선언’이 만들어진다 해도 6.29선언을 획기적으로 넘을 것인지를 장담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6.29선언과 같은 방식으로 정리되지도 않을 듯하다. 예상컨대 ‘촛불선언’이 만들어진다면 그건 대의제 민주주의의 밖에서 광장의 실천과 정신을 함축하는 방식이 될 공산이 크다.

그렇다면 이걸 어디에다 써먹을까. 제대로만 만들어진다면, 그러니까 마치 헌법 제1조 처럼 줄줄 외울 수 있는, 광장에서 실천으로 의미가 공유된 그런 ‘촛불선언’이 만들어진다면,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와 공백을 들춰내며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의 그림을 그리는데 유용하게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2년 안에, 곧, 개헌이 추진되면 글자 한 자 밀어넣기 힘든 상황이 된다. 이럴 때 ‘시민인권선언’을 들이밀고 실갱이를 하고 힘겨루기를 하는 지렛대로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신자유주의 권력이 시민의 삶에 위협을 가하는 요소요소마다 이 선언을 근간으로 해서 끈질긴 저항을 펼쳐나갈 수 있으면 된다.

‘절망의 민주주의’를 대체할 '직접민주주의'는 아직...

‘시민권리선언’과 유사한 문제의식은 백승욱 교수의 글에서도 확인된다.

백승욱 교수는 “헌정적 위기의 요소들과 삶의 현장에서의 투쟁을 결합하는 방법”을 고민하되 적어도 세 가지 요소를 담아내야 한다며 “법이데올로기를 의문시하는 효과를 가져야 한다는 점, ‘노동자 시민’이라는 계기를 활성화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 사상적 자기검열의 벽을 허무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 등을 짚었다.

백승욱 교수는 이 세 가지 요소와 결합하는 가운데 “하나의 구호가 이 모든 효과들을 한꺼번에 담아낼 것으로 기대할 수는 없고 서로 다른 운동들이 결합되어야 하겠지만, 우리는 <‘나는 이런 세상에 살고 싶다’ 선언자대회> 같은 운동이 아래로부터 조직되어 전국적 파장력을 갖게 되고, 그것이 ‘민중의 권리선언’으로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삶의 공간에서의 변혁을 위한 노력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적 조건들이 없이는 곤란함을 겪을 것이며, 그럼에도 이런 삶의 공간들 속에서의 변혁을 위한 시도가 없다면 대중들을 정치의 주체로 만들려는 인민주권의 시도의 내용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니까 백승욱 교수는 “어느 누가 집권하던 후퇴시킬 수 없는 대중들의 민주주의의 최저선을 확보하는 것, 그로부터 더 많은 민주주의를 작동시켜 가는 것”에 관심을 집중했다.

그렇다면 박래군 활동가의 고민이 멈춰 선 지점은 어딜까.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7.8월호에서 박래군 활동가는 “인권운동진영이 더 이상 담론에서 밀리지 말고, 적극적으로 시민들의 변화의 열망을 권리선언이든 권리헌장이든 간에 담아내는 과정을 밟아야 하지 않을까요? 거리에서 경찰의 폭력을 감시하는 활동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직접민주주의, 주권자에 의한 직접 정치의 모델을 만드는 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한다.

‘촛불선언’을 만들고 주권자의 직접 정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데, 아직 이 실체는 확인되지 않는다. 박래군 인권활동가가 맞닥뜨리고 있는 지점이다. 직접 정치의 모델, 그것은 아직 추상이다. 시민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고 거리의정치가 열리는 것만으로 직접민주주의나 직접 정치가 환원될 수 없는 까닭이다. 때문에 촛불의 주체들은 직접민주주의의 구체적인 뭔가를 갈망하지만, 제도 권력과 대의 민주주의의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급진적 인식과 실천이 조우하는 현실은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가령 ‘민주주의는 장벽을 넘는다’는 실천은 곧 ‘장벽을 넘은 다음의 민주주의’의 질문 앞에 머뭇하게 된다. 거리의정치 내부의 장벽이라 할 비폭력 논란을 넘고 신자유주의 권력의 상징이라 할 명박산성을 점령할 수 있었지만, ‘절망의 민주주의’를 대체할 ‘직접민주주의’의 실체가 확인된 건 아니다. 단정하자면 ‘거리의정치’에서 시민 참여의 직접성이 제도 권력과 대의 민주주의 안에서의 직접성과 연결되어 있지 않는데, 또 연결되지 않는 데 연유한다.

정당정치와 거리의정치에 대한 당연하고 한가한 조합

6월 10일을 경과하며 ‘촛불 이후’ 대안에 대한 많은 토론이 이루어졌는데, 정당정치와 거리의정치를 주제로 하는 의견이 봇물이 터지듯 하였다. 정당정치의 한계이므로 정당정치를 강화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거나, 정당정치와 거리의 정치가 병행 발전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제기되었다. 예상치 못한 대중행동(거리의정치)을 목도하면서, 과거 거리의정치가 어떻게 정당정치로, 또는 제도 권력 구조로 수렴되었는가를 비교하는 가운데 전망 논쟁이 펼쳐졌다.

가령 이남주 교수는 정당정치의 반성과 거리의정치의 ‘정당’화를 두고 선순환관계를 발전시킬 필요를 제기했다.

이남주 교수는 “거리의정치가 정치발전에 대한 긍정적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이를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력구도 내로 흡수하기 보다는 제도정치, 정당정치와 병행하면서 정치와 민주주의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원천으로의 기능에 주목할 필요”를 말하고 “거리의정치가 갖는 해방적 기능을 더욱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정치행위의 새로운 형식과 내용이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거리의정치를 생활정치로 설명하는 경우는 많으나 현재의 거리의정치가 구체적인 생활공간과의 결합 정도는 매우 낮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이로부터 이남주 교수는 “현재 거리의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다양한 단위들 사이의 의제와 주체의 특성에 맞는 수평적 교류들의 활성화가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런 맥락이면 ‘불매운동’을 계기로 한 언소주(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의 활약이나 소비자주권운동에 주목해볼 수도 있겠다. 언소주는 언론NGO 비영리단체(법인)화를 추진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강남의 학부모들이 지역에서 촛불을 밝히고 교육 문제를 토론하며 네트워크를 한다거나, 과천의 주민들이 광우병 쇠고기 반대 프랭카드 걸기 운동을 하며 지역 주민의 생활과 연결하는 활동 등 촛불의 효과는 분명 작지 않다. 하지만 촛불시위에서 분출된 요구를 5대 의제로 압축해서 본다면, 각 의제에 대한 대안적인 논의와 실천을 전개해온 ‘수평적 교류’ 즉, 의제별 연대활동은 촛불 이전부터 존재했고, 촛불 과정에서도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과제를 제기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설득력을 갖는 ‘활성화’ 프로젝트가 제시된다면 모를 일이나, 결합해야 한다는 당위 정도로는 이후 실천 동력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소환제, 직접민주주의 희구 과잉의 산물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직접민주주의를 실행하자며 제기된 하나의 방안으로 ‘소환제’가 주목된다. 2004년 총선 당시 ‘더 많은 민주주의’를 둘러싸고 운동 진영 내부 논쟁이 벌어진 바 있었고, 주민소환제가 이미 법률적으로 도입되어 있지만 이번 촛불 국면에서 적극적인 대안으로 거론되지는 않는 분위기다.

다만 우석훈 교수가 '주민소환제를 국민소환제로, 주민투표를 국민투표로 강화하자'는 주장을 펴고, 일부 블로거와 네티즌들이 온라인 토론을 펼치면서 이목이 쏠렸다.

우석훈 교수는 오세훈 서울시장을 축으로 서울시 한나라당 구청장과 광역의원을 하나의 명부로 해서 소환 서명을 받자고 제안했다. 촛불 망언을 한 김문수를 축으로 경기지역의 한나라당 시장들과 경기 광역의원도 하나의 축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기구로는 부안 주민투표를 할 때 했던 기구와 비슷한 형태로 각 지역별 주민카페 같은 것이 결합되도록 하고... 우석훈 교수는 “이를 발의하는 것만으로도 한나라당의 힘 절반을 무너뜨리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미 도입되어 있는 주민소환제와 주민투표를 국민소환제와 국민투표로 강화해서 국회와 대통령도 소환 대상으로 삼자는 것이 골자였다.

6.10을 앞두고 제기한 이 글에서 우석훈 교수는 “6.10 기념제는 이 사건이 워낙 시청에서 광화문 사이에서 벌어진 것이니까 전또깡을 내렸던 사건을 상징적으로 재현한다는 점에서 시청이 맞을 것 같고, 그 다음에는 분산되어서 각 구청장이 있는 구청과 한나라당 당사로, 자신이 사는 동네로 확산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고 제언하기도 했다.

이 시나리오 대로라면 최소한 최근에 서울시의회 의원들의 최악의 뇌물 사건이 터진 데 대해 즉각 소환 운동이 펼쳐지고 있어야 한다. 오세훈 시장과 한나라당 전체에 대한 정치적이고 상징적인 소환보다 범죄가 뚜렷한 서울시의회 의원의 즉각 소환은 명분과 정당성 모두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서울시당이 주민소환 의지를 다소 정치적으로 선언한 것 외에 이렇다할 가시적인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춧불집회에 나선 시민들이나 추진 주체 공히 ‘소환제’가 많은 비용을 들이고도 과정과 결론을 예측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부담을 갖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다음카페 등에서 국민소환제 추진을 위한 서명운동을 펼치고 있는 김옥선 대외협력팀장은 “시장은 서울시민의 10%가, 시의원은 20%가 발의해야 하므로, 쉽지 않은 일이나 법적 절차를 밟아가며 차근차근 준비중”이라고 말했다. 법적 요건을 갖추기 위한 준비와 국민소환제를 추진이 덩치가 큰 일인만큼 실제로 성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설명이다. 김옥선 팀장은 “올해 안에는 발의하게 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덧붙였다. 꼭 그렇게 되었으면 하고, 누구나 힘을 실을 만한 일이다.

그런데 주민소환제든 국민소환제든 소환제가 주민(국민)이 참여하는 직접행동,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갖고 있지만,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내용은 아니다. 국민소환제가 5년단임 직선 대통령제라는 87년헌정체제의 권력제도의 일부를 보완하는 의미를 갖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이 형식에 누가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그러니까 폄하할 일은 아니지만 국민소환제가 곧 직접민주주의인 것처럼 인지되는 것도 위험 요소가 있다는 이야기다.

▲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직접민주주의?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일전에 젊은 블로거들과 좌담 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는데, 이들은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과대한 기대를 한방에 날려버리는 토론을 펼쳐보였다.

 한윤형 : 논점을 바꿀 필요가 있는데, 지지율이 떨어지면 뭔가 바뀌어야 정상인데 선거도 없고 할 게 없다.
김현진 : 교육감 선거!
한윤형 : 물가상승률 7%, 경제성장률 4%, 지지율 7%, 그래서 747이라고도 한다.
노정태 : 7.4% 지지율을 7월 안에 달성했다는 해석도 있다.
한윤형 : 이쯤 되면 방도가 있어야 하는데 청와대만 막겠다, 나머지는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김현진 : 세종로 니네 가져 이런 거지.
한윤형 : 그렇다고 혁명을 할 정국도 아니니 사람들한테 뭔가 요구하기도 그렇다. 제도적으로 어떻게 할 방법은 없고, 그래서 직접민주주의 이야기하는데, 근데 직접민주주의라는 말이 좋은 말인지 모르겠다.
김현진 :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한윤형 : 굉장히 아련한
노정태 : 꿈 속에 있는
한윤형 : 평생의 이상형 같은. 누군지 모르겠고, 걔가 쌍꺼풀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아련한. 대의민주주의가 안 굴러간다고 이야기하는 건 맞는데 어떻게 보완할까를 이야기해야.
완군 : 직접민주주의로 갈 거냐, 국민소환제냐, 대의민주주의냐 이야기하지만 이 에너지가 과연 형질 전환되는 에너지일까.

좌담에 참석한 블로거들은 최소한 촛불시위 현장에서 제기되는 ‘직접민주주의’의 거품을 걷어내는 공감대를 보여준다. 직접민주주의의 구호만 들고 촛불집회에 참석하느니 차라리 대중들이 ‘놀다 가도록’ 해야 한다는 맥락의 ‘습격과 놀이’를 언급하기도 했다. 추상의 직접민주주의 논란 대신 시청에서 비정규직 유인물 나눠주기 등 당장에 할 수 있는 일들을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대체하고 자치할 대안이 없는 민주주의는 무엇?

6월 말 경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직접민주주의적 요소를 강화해야 하고, 강화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대의제를 대체하기보다는 보완하게 될 것이다. 국민들도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문제 제기해봐야 한다. 정치권력을 어떻게 선출해야 하는가, 정치권력을 어떻게 재편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까지 도달해야 한다”고 짚은 바 있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은 무력하고 신뢰받지도 못한다는 진단을 덧붙였다.

노회찬 대표는 이명박 정권 퇴진 슬로건에 대해서도 “‘정권 퇴진’이라는 표현을 구체적인 정치 프로그램으로 가져가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상황이 무르익지 않았다거나, 대안권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현 상황을 이끌고 갈 정치적 응집력이 없다는 점이 문제”라며 회의적이면서도 동시에 비교적 정확한 의견을 피력했다.

이명박 정부가 10% 안팎의 지지율 속에 산성을 쌓고 청와대에서 농성(?)을 하는 모양을 하면서도 ‘퇴진’당하지 않을 수 있는 건 5년 단임 권력의 정통성을 인정받은 데 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잃어버린 10년의 찬탈자들은 행정권력과 의회권력 장악의 위력에 기대어 촛불 진화의 갖가지 수단을 펼쳐가는 것이다. 광우병 협상에 이은 방송통신심의위의 시사프로그램 '공정성' 심의, YTN 낙하산, KBS 장악, 검찰의 MBC 죽이기 등 언뜻 이해하기 힘든, 비상식적이고 황당하기까지 한 언론사유화 공작이 시사하는 바도 여기에 있다.

대체하고 자치할 대안이 없는 한 ‘민주주의’는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얼마나 반동적일 수 있는 지는 현실에서 쉽게 확인된다. 87년헌정체제 안에 녹아있는 민주주의 지배 주체가 바뀌지 않는 한, 87년헌정체제를 바꿔낼 대안 정치가 출현하지 않는 한 ‘거리의정치’ 그 직접민주주의의 한계도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서울시교육감 선거가 절묘한 시점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번 선거 결과가 곧 촛불에서 만들어진 직접민주주의의 열망과 실체가 평가되는 바로미터라고 한다면 과연 오버일까.

<출처 : 참세상, 유영주>











유럽의 사례들을 둘러봐도 지금의 촛불들은 딱 들어맞는 경우가 없다.
드물기라도 하면 되겠지, 싶지만 그게 참 거시기하다.

영국의 명예혁명 보듯이 뭔가 제도적으로 남기기라도 해야지 싶기도 하고,
프랑스의 국민의회처럼 나름의 소통구조를 만들 수 있었음 하는데.
우리에겐 프로이센처럼 앞뒤 가릴 능력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빌헤름 2세만 있는 거 같기도 하다.

규정할 수 없는 흐름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그 흐름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노력들 또한 현존한다.
가는 길 험란해도 든든한 이유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