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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뎌 볼 만한 게 나왔다. 다크 나이트

영화방

by 한가해 2008. 8. 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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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돈(chaos)을 선택했지” ‘조커’의 말이다. 영화 《다크 나이트》는 조커의 뒷모습으로부터 시작해 ‘배트맨’의 뒷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혹은 범죄의 시작을 알리면서 낯에 시작된 영화는 범죄가 끝나는 밤에 끝을 맺는다. 이것은 일반적인 범죄영화의 규칙과는 좀 다르다. 당연하지만 조커는 ‘카오스(chaos)’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모든 범죄는 규칙을 따른다. 그런데 카오스는 어떠한 규칙도 없는 상태다. 혼돈(混沌)? 로마의 작가 오비디우스 이전에 카오스는 ‘태초의 빈 공간’을 의미했다. 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 빈 공간에서 가이아(대지)와 우라노스(하늘)가 태어난다.

우리는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조커의 은행 강탈 장면을 보게 된다.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일을 벌이지만 결국 내분에 의해 범죄협력자 대부분이 죽고 마는 강탈 영화의 기본 공식이 고스란히 압축된 장면이다. 이것은 이 영화가 그려낼 세계를 드러내는 일종의 지표다. 여기서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 조커가 내민 카드는 ‘카오스’다. 카오스는 혼돈이기 이전에 ‘세계’를 탄생시킨 공간이다. 그리고 카오스는 밤(Nyx)을 낳고, 밤은 죽음과 불화를 낳는다. 여기까지가 신화의 세계다. 이것을 역으로 배치해보자. ‘죽음과 불화의 밤에는 혼돈이 찾아온다.’ 영화의 시작에서 드러냈던 지표인 범죄의 세계다.

《다크 나이트》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악당을 응징하는 배트맨 때문에 범죄조직은 숨죽인 채 살아간다. 더군다나 정의감에 불타는 검사 하비 덴트와 경찰청장 고든도 크게 한몫 거든다. 이때 배트맨이 평소 피래미로 취급하던 조커라는 악당이 배트맨에게 시비를 걸어온다. 그런데 이게 심상치가 않다. 조커는 그저 그런 시시한 악당이 아닐뿐더러, 더군다나 그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악(惡)’도 아니다. 이제 조커의 활약이 펼쳐지고, 이에 대항해 배트맨, 하비 덴트, 고든이 힘을 합친다.

영화 《다크 나이트》는 잘 만들어졌으며 매우 복잡한 영화다. 잘 만들어진 영화가 그러하듯이 우리는 이 영화를 여러 가지 다양한 관점에서 읽을 수 있다. 공허한 세계를 뒤로하고 떠나는 서부극의 관점에서도 읽을 수 있으며, 악과 혼돈, 범죄의 형성이라는 관점에서도 읽을 수 있다. 혹은 배트맨, 하비 덴트, 조커의 ‘존재’라는 관점에서도 읽을 수 있다. 물론 정치적인 관점에서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흥미로운 관점은 이미 형성된 세계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영화의 배경인 고담市는 범죄자들의 세계다. 이 공간에 선한 의지를 갖춘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그 가운데 한 명이 배트맨으로 그는 일종의 자경단(自警團)원이다. 그리고 이 공간은 부르주아(bourgeois)의 세계다. 《배트맨 비긴즈》가 ‘빈곤’을 배경에 깔았던 반면에, 이번 《다크 나이트》에서는 디즈레일리의 말을 살짝 바꾸자면 ‘두 개의 시민 Two citizen’ 가운데 하나의 시민(빈곤층)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시민(부르주아) 사회에 관한 영화가 된다. 이미 형성된 시민 사회가 맞닥뜨릴 고난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가 주요한 질문이 되는 것이다.

영화가 제시하는 것은 두 개의 상태다. 하나는 배트맨이 만들어낸다. 그는 그가 가진 재력을 이용해 수많은 사람을 감시한다. 이는 배트맨의 공리적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는 모든 범죄를 제거해서 사람들이 더욱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물론 이를 위해서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많은 불편을 겪어야만 한다. 영화의 중반, 조커를 쫓는 배트맨은 자신의 앞길을 막는 모든 것을 파괴하며 달려나간다. 게다가 심야의 빌딩 옥상에서 수많은 사람의 전화를 감청한다. 그런데 배트맨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소리의 파장을 이용한 기술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행동까지 감시한다. 마치 공리주의자 벤담이 설계한 판옵티콘과도 같다.

또 하나는 조커가 만들어낸다. 그가 제시하는 것은 아나키 상태다. 그런데 조커의 행위를 설명할 때 등장하는 이 아나키(Anarchy)라는 말은 통치자 없는 무정부 상태가 아니라 홉스적 의미에서의 자연상태에 가깝다. 조커는 자신은 악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 말은 거짓이 아니다. 조커는 모든 것이 기록되는 사회에서 어떠한 기록도 남기지 않은 존재다. 그는 그 자신이 선택한 데로 존재하지 않는(chaos: 無) 상태다. 계약에 의해 형성된 시민사회라는 이론 속에서 그는 어떠한 계약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자연상태의 인간인 것이며, 어떤 계약에도 속하지 않으므로 그가 인간사회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죄(악)’가 아니다.

그리고 이미 형성된 시민사회가 있다. 여기서 배트맨은 어쨌건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다. 그는 기본적으로는 범죄자다. ‘자력구제 금지의 원칙’을 어겼을 뿐더러, 사유재산을 파괴한다. 시민사회가 형성되면서 만들어낸 가장 큰 원칙은 사유재산에 대한 공격을 범죄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유재산에 대한 더 큰 공격을 막고자 사람들은 이를 용인한다. 범죄행위를 하지만 죄는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조커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다. 조커는 돈의 가치 따위는 철저하게 무시한다. 그는 거대한 돈더미를 불태우며 이를 직접 확인시켜 주기까지 한다. 시민사회의 역사는 곧 사유재산의 역사다. 그러니 조커는 시민사회 자체를 부정하는 존재가 된다.

조커는 그야말로 이해 불가능하며 대적할 수 없는 자연재난처럼 묘사된다. 그는 마치 모든 인간의 행위를 거대한 지도를 펼쳐보듯 전지적 관점에서 파악한다. 그로 인하여 배트맨은 더욱 위기에 몰린 채 극단으로 치닫는다. 영화의 마지막에 조커는 고담 시민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하나의 딜레마를 제시한다. 죄수의 딜레마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관객에게도 하나의 사태에 대해 고민해볼 것을 요구한다. 예를 들자면 미국의 ‘테러방지법’과 같은 정책이 그렇다. 강력한 통제를 요구하는 이러한 정책들은 명목상 ‘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보호’를 목적으로 한다.

영화에서 배트맨은 소리의 파장을 이용해서 고담 시민 전체를 감시한다. 그는 하나의 장치를 이용함으로써 한 개인의 내밀한 사생활마저도 감시 가능해진다. 물론 배트맨은 고담 시민 전체의 몰살을 막으려는 명분을 가진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가능성일 뿐이다. 그리고 이를 현실로 돌렸을 때 이미 미국은 하나의 가능성을 바탕으로 이미 그러한 정책을 펼치는 중이다. 영화와 현실이 겹쳐지는 이 지점에서 우리는 판옵티콘으로 제기된 유명한 명제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나?’를 떠올릴 수 있다. 시민사회 전체를 감시하는 감시자가 배트맨이 아니라 조커라면?

바로 여기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조커를 등장시켜 죄수의 딜레마를 제시한다. 영화에서 ‘죄수’가 보여주는 영웅적인 행동을 딱 잘라서 말하자면 ‘신뢰의 회복’이다. 죄수의 딜레마는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상태다. 신뢰가 상실된 사회는 극단적인 통제사회로 흘러간다. 그리고 이러한 통제는 개개인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심성은 점차 피폐해져만 간다. 영화상에서 극단에 몰린 고담 시민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신뢰를 회복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죄수의 딜레마를 극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리라 판단한다. 사회적 신뢰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깨달음을 얻듯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배트맨 역할을 맡은 크리스천 베일이 말한 “배트맨을 필요로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사회가 실패했다는” 말이 큰 울림을 주는 이유다.

영화의 마지막 모든 사건이 해결된 듯이 보이고, 배트맨은 가까스로 얻은 사회적 신뢰의 붕괴를 막고자 스스로 범죄자의 낙인을 뒤집어쓴다. 애처로운 행동이지만 딱히 다른 대안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조커가 고담 병원을 장난스럽게 무너뜨리듯이 신뢰의 붕괴는 손쉽지만 그것을 다시 쌓아올리는 데는 무한한 노력과 엄청난 시간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미 바닥난 한국의 사회적 신뢰에서 우리는 그러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영화에서 조커는 ‘혼돈’을 선택했다. 모든 것을 無로 돌리고 다시 시작하자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래서 경찰청장 고든은 이를 ‘아나키’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사유재산의 보호가 무력해질지도 모른다는 ‘무정부 상태’에 대한 시민사회의 불안을 드러내는 말이라 하겠다. 조커의 뒷모습으로부터 시작해 배트맨의 뒷모습으로 끝나는 영화 《다크 나이트》는 그것을 앞을 향해 전진해야 하는 당위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문제는 사회적 신뢰의 회복은 단지 사람들의 각성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커의 마지막 대사가 이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가장 우선해서 해야 할 일은 모든 사회적 통제장치들을 ‘제도적으로’ 중지시키는 것이 사회적 신뢰 회복의 첫걸음이다.


<출처 : 판타스틱 청년백서>













'아나키'를 무정부가 아닌 자연상태를 일컫는 단어로 해석하고 있는 dakdoo님의 글에서 잠시 머뭇.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도 못 본 상태라 이것부터 봐야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크리스찬 베일과 마이클 케인, 게리 올드만 그리고 조커로 분한 브로크백 마운틴히스 레저까지.
주저할 이유가 없다.

배트맨이 정의라는 통제가 어쩌면 신뢰회복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임을 배트맨은 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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