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은 내가 오류와 희망에서 ‘대중성’ 보다는 ‘좌파 정체성’이 더 중요하다고 '근본주의적으로' 주장하고 있다고 오해하는 듯한데, 실은 그 반대다. 이를테면 “선거에서 연 이은 실패의 주요한 원인이 대중성 강박으로 인한 프레임 오류”라는 내 말은 ‘대중성을 좇느라 좌파적 정체성이 훼손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잘못된 대중성 추구로, 즉 최소한의 정체성조차 포기해버림으로써 대중성을 잃었다’는 말이다. 체제 안에서 활동하는 정당에 ‘선거에서 연 이은 실패’보다 더 ‘대중성의 위기’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국면이 있겠는가?
현재 상황은 진보신당이 ‘대중적 실용노선’에 성공하여 엄청 잘 되고 있는데, 내가 까탈스럽게도 그 정체성이 흐려지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는 게 아니다. 분명히 밝히자면, 나는 오히려 현재 진보신당으로선 정체성이 위험하지 않은 수준으로 흐려지더라도 일단 유의미한 수준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내가 문제 삼는 건 ‘대중적 실용노선’이 아니라 ‘실패한 대중적 실용노선’이다. 진보신당이 “진중권 씨를 비롯한 진보신당 당적의 자유주의자들”의 주도로 추구해온 ‘대중적 실용노선’이 매우 대중적인 듯 보이지만 전혀 대중적이지 않으며, 매우 실용적인 듯 보이지만 전혀 실용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음을 ‘좌파의 일원’으로서 환기한 것이다.
며칠 전 진보신당 당원인 한 고등학생에게서 편지를 받았다.(전문은 여기에) 그는 진보신당이 대중성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대중들에게 진보신당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설득해야 한다고 했다. “제 짧은 소견으로는 '자유주의 세력의 위선'을 폭로해 나가는 게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 한겨레 칼럼에서, 노회찬 당시 후보가 서울시장 선거 직전 토론회에서 하신걸 보고 비판하신 거에 백번 공감하는 편입니다. 그러니깐, 우리는 한나라당을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민주당과 같은 편인 것도 아니라는 걸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그런 거요.”
그의 말에 내가 진보신당에 하고 싶은 모든 말이 들어있다. 좌파는 물론 이명박을 반대하며 이명박과 싸운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그 싸움의 성과는 모조리 자유주의 세력이 차지하게 된다. “우리는 한나라당을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민주당과 같은 편인 것도 아니라는 걸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그런 거”가 중요한 것이다. 사실 노회찬, 심상정 씨가 '고작'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한국사회는 여전히 대중적 인지도가 선거 결과를 좌지우지 하는 사회다. 특정한 사람을 거명해서 안 됐지만, 지난 선거에서 국회의원이 된 유정현 같은 사람은 국회의원이 될 어떤 활동이나 이력이 없는 ‘연예’ 아나운서였다.
그런데 노회찬 심상정 씨처럼 대중적 인지도가 높을 뿐 아니라, 정치인으로서 신망이 높은(한국 정치인들 가운데 최고 수준이 분명하다) 사람들이 고작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진보신당 후보이기 때문이다. 진보신당이라는 당이 왜 굳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대중들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두 사람이 민주당 소속이었다면 이미 몇 선을 거듭하며 강력한 대통령 후보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다.(‘강력한 대통령후보 노회찬’ ‘박근혜를 압도하는 여성 대통령 후보 심상정’, 생각만으로도 기분 좋지 않은가?)
촛불 광장에서도 두 사람은 한나라당은 물론 민주당의 정치인들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신망이 높았다. 그들은 반이명박의 스타였다. 그러나 그들은 ‘왜 이명박을 반대하는지’ 대중들에게 설명하는 데 성공했지만 ‘반이명박의 대안이 왜 민주당이 아니라 진보신당인지’를 설득하는 데는 완전히 실패했다.
평범한 한 사람이 진보신당을 지지하게 되는 과정은 두 단계로 이루어질 것이다. 첫 번째 단계는 이명박을 반대하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이명박을 반대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민주당 지지를 넘어 굳이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것이다. 첫 번째 단계조차 이르지 못한 사람이 진보신당을 지지할 가능성은 전무하니, 관건은 두 번째 단계다. 두 번째 단계를 만들어내는 건 진중권 씨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상식의 회복’이 아니다. 물론 ‘상식의 회복’이라는 구호는 어떤 좌파적 구호보다 훨씬 ‘대중적’이지만 대중들을 첫 번째 단계에 만족하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진보신당이 대중들에게 해야 할 말은 ‘상식의 회복’이 아니라 ‘상식의 회복만으로는 부족하다’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이라는 ‘상식을 가진’ 자유주의 정권이 서민대중의 편이 아니었음을 대중들은 분명히 기억한다. 그러나 자유주의 세력은 ‘상식조차 없는’ 이명박과 자신들의 차이를 끝없이 부각함으로써, 즉 ‘김대중 노무현만큼이라도’라는 선전을 거듭함으로써 반이명박 정서를 모조리 독식해왔고 지금도 그렇다. 그들이 지난 지방선거에서 대승한 것도 오로지 그 덕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진보신당은 뭘 해야 할까? 이 고등학생의 말대로 “자유주의 세력의 위선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걸 폭로하지 못하면 죽 쒀서 개주는 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내가 오류와 희망에서 지적하고 이 고등학생이 언급한 노회찬 씨의 서울시장 선거 직전의 인터넷 토론회는 ‘프레임 오류’의 극치였다. 선거를 한참 남긴 상황이라면 모를까, 선거 직전 아닌가. ‘한명숙이 아니라 노회찬이어야 하는 이유’만을 강조해도 모자랄 판에 줄창 ‘오세훈을 막아야 하는 이유’만 떠들어댔으니, 노회찬을 고려했던 사람들조차 ‘한명숙에게 표를 몰아주어야 한다’고 결심하게 만드는 토론회였던 셈이다. 물론, 토론회 자체는 진중권 씨의 독설과 재담으로 매우 ‘대중적’(!)이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민노당처럼 일찌감치 자유주의 세력에 줄을 서서 개평이라도 얻지 뭐 하러 독자 출마를 하는가? 이게 고도의 정치공학이 결부된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인가? 이게 ‘대중성을 잃더라도 좌파적 정체성을 사수하자!’는 근본주의적 주장인가? 농담이 아니라, 상황 설명만 있다면 고래가그랬어를 보는 초등학생들도 할 수 있는 간단한 계산이다.
그런 간단한 계산조차 안 된 ‘대중적 실용노선’이 오늘 진보신당의 위기를 만든 것이다. 그런 ‘대중적 실용노선’이 ‘왜 민주당이 아니라 진보신당이어야 하는지’를 대중들에게 설득하는 데 실패하게 하게 한 것이다. 노회찬, 심상정 씨의 한국 정치인 최고 수준의 대중적 인지도와 신망을 재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노회찬 심상정, 훌륭하고 능력 있는 정치인들이지만 이명박을 막으려면 그래도 민주당을 찍어야지!”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당시엔 욕도 했었지만 이명박과 비교하면 얼마나 훌륭한 대통령이야!”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대중성 강박으로 인한 프레임 오류”라는 내 말은 바로 그런 이야기다. (계속)